문선명선생 말씀 - 2011년 2월 28일 (月), 천화궁.
(경배식)(『문선명 선생 말씀선집 20권』‘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자’ 부터 훈독 시작; ⋯⋯이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형제와 식구들에게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웠사옵니다. 아주!) (39분 56초)
양!「예.」선생님이 무슨 말이든가? 새로이 결심한 모든 것을 중심삼고 그 결심 아래 모든 것을 밟고 위에 서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을 말했다구. 얘기 해봐요.「예.」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번 대회 끝나고 간다고 1분 동안에 얘기할 걸 말해요.「예.」
(양창식 회장 소감 발표) (44분 17초)
그 때 말씀 따라가는 그 때 말씀 위에 가야 돼요. 그 때 말씀 내용은 다 없어질 내용이지만 그 내용이 없어지지 않고 위에 가 올라간 사람들의 또 다른 새로운 결심을 촉구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자신의 자리, 그 자리에 비교할 때에 자기들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의 큰줄 아는데 천태만상(千態萬象) 작은 자리를 알고. 천태만상(千態萬象) 위에 설 수 있는 본래의 가치를 역사시대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 드러나는 그 사실 자체는 초 세상을 초역사적인 그것이 이루어져야 돼요.
예를 들면 하나님하고 선생님하고 다른 게 뭐예요? 양창식!「예.」하나님은 모르지만 선생님은 하나님이 어떤 자리에 있는 것도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어떠한 자리냐 하면 천년 만년 위에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이 천년 만년 위에 서기 위해서는 그거 설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그 무엇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애는 예수님 이 분이 지금 역사상으로 하나님의 대신자다 이런 말까지 했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와 같이 하나 못됐어요. 예수님이 지금까지도 예수님이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이 세계의 하늘땅 자체를 주고도 대등한 자리 위에 있어요.
예수님이 옛날에 갖고 있던 생활하는 한 부분이라도 쓰던 젓가락이 라도 있으면 이 세상과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하나님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묻느냐? 예수님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제아무리 다 소원성취해도 그 소원성취 하던 것을 오늘날 인류역사가 역사를 통해 가지고 바라는 소원이 뭔가? 바꿀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하지만은 그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중심삼고 우리가 예수님보다 못해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선생이 되어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느냐 할 때에 만일 그렇다면 그 때 그 잃은 자리에 가치를 만이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지금까지 살던 그 때의 말은 같지 않고 하나밖에 안 될 수밖에 없었다 할 때는 이루어질 때의 만의 자리를 어디서 찾느냐.
예수가 다 남기고 갔기 때문에 재림주가 와서 이것을 만의 자리를 보여줘야 돼요. 그 재림주 자체라는 것은 만의 자리에 섰다 예수님의 만의 하나 가지고 예수님이 못하는 자리에 있을 때 만 자리에 서실 수 있는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한 티끌만한 것도 그 전부 다 예수님 몇 천배 가치의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때 지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그 분과 같이 살고 있다면 우리의 가치가 예수님보다 못한 거예요. 예수의 천 배 만 배 대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하나로 볼 때에 하나님을 해방해 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시대에 나타나서 이런 거 할 때에 그 가치의 고생한 그 기준이 얼마나 높겠느냐? 예를 들면 참부모라는 존재가 그런 자리에 섰다면 참부모의 영원한 티끌만한 것도 예수가 원하는 이상의 가치 것이 해 줘야 할 텐데. 그런 가치로서의 예수님 백 배, 천 배 이상으로서 모실 수 있는 효자가 있고 충신열사가 있고 또 메시아 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게끔.
그러면 그 분이 갖고 있는 그 모든 끝날의 뜻을 이루는 예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의 하나님 자체에 바꿀 수 있는 그 자체를 대하는 우리의 생활은 지금 그 때가 앞으로 온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대에 가치를 중심삼고 앞에 오시는 재림주의 참부모의 가치는 예수의 갖고 있는 무엇? 그 시대 살고 있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라는 거예요. 그 가치를 자기가 지니고 살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을 갖고 그 분을 모시고 그들을 위할 수 있는 생활의 중심이 어디 있겠느냐? 물을 때에 그러면 그 오시는 주님이라는 것은 그 생활의 모시고 살 수 있는 자체의 몇 천 대 가치에서 나타나는데 삶의 생활.
오늘날 타락한 여러분이 살고 있는 현재의 입장에 있어서 그 가치와 몇 천만분지의 일도 안 되는 차이를 가졌다고 모신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꽃 하나를 보더라도 예수님 시대와 그 분을 모시고 살고 있는 꽃 자체는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꽃이라는 거예요. 이 우주 가운데 영원한 세계 가운데 마지막 결실로 나타난 그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모실 수 있는 존재는 예수 같은 교회 하나님까지 해방할 수 있는 인격 이상의 존재가 돼야 된다는 말을 볼 때에 하나님 앞에 어머니 이상의 것이요, 스승의 이상의 것이요, 존재의 이상의 것이에요. 그 시대의 모든 것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 그러한 자리라고 할 때에 그 자리에서 오늘 우리가 산다는 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가치 내용을 갖고 있느냐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표적 이상의 자리인데 그런 자리를 중심삼고 같이 살 수 있는 참부모의 가치의 자리, 만왕의 참부모의 가치의 자리는 무한한 가치라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무슨 왕이 몇 천만 몇 만 개 있더라도 몇 천 몇 만 배의 가치를 합해도 그 열매 맺을 수 있는 그 분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입장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의 부족을 넘고 그 위에서 하나님을 해방할 수 있다고 하는 말,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그런 자리를 사람 생활의 환경이.
이 자리가 어떤 자리에요? 예수님 시대의 그런 사람을 한 시간 대하던 사람이 있다 할 때는 천년 만년의 예수가 같이 산 생활한 사람도 그 일을 대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 사는 입장이 오늘 통일교회가 바라는 최고의 이상적인 종착점에서 모실 수 있는 주인이 참부모라 할 때 참부모를 어떻게 모셔 봤느냐 그거예요.
이게 참부모님 아닙니다. 너희들이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 이래 주소, 저래 주소. 부모님을 못 믿습니다. 부모님 못 따라가겠습니다.” 어디 생각이나 해봤나 그렇게 봐요. 그 분은 하나님까지도 아버지 이상으로 스승 이상으로 어떤 전체의 최고의 하나의 절대가치 기준 이상으로서 지낸 가치 전체를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거예요.
박원근이 여기 우리 어머니. 어머니가 그 분과 더불어 산다는 어머니 대했던 대등하게 모시고 살 때 거기 소속한 모든 만물만상에 대등한 가치존재로서 있는데 내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느냐?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거예요.
(박원근 간증) (58분 35초)
(양창식 보고) (60분 37초)
선생님의 생활이 나타나지 않은 복중에서 부모님이 임신한 그 자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늘의 땅 모든 몇 억만 가정도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에요. 그러면 선생님이 여기서 일생동안 93세까지 산 어느 한날 어느 때든지 예수님과 하나님이 완성한 자리까지 닿더라도 그 점에 미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엑스(×)될 수 있는 이것이 차원이 선생님은 이 세상의 차원 이상의 최고의 대우주의 엑스(×)가 될 수 있는데 엑스(×)가 없어요. 비교할 것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큰 대우주 앞에 한 점을 터트려도 그 한 점이 대우주의 몇 억만 분지의 일의 기준에서 하나되어서 기아가 맞아야 돼요. 그러면 이 전체의 가치의 중심은 그 때 살고 있는 그 핵 중심삼고 살고 모실 수 있는 기준은 어드런 기준이 있느냐?
오늘 이 시간 복중 선생님이 태어나기 시작한 모든 기념했던 일들은 세상에 다시없는 역사시대로 지나왔지만 그 지나온 역사가 없어지지 않을 때 그 전체를 여러분 어느 곳을 거쳐 가더라도 여기 큰 기아의 가치의 내용이 그 작은 기아 속에 있어가지고 맞추게 되면 하나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한 93년 동안 말씀한 전체가 온 하늘땅의 전체 이 사람만이 아니에요. 그것이 전부 다 성별된 거룩한 것으로서 그 때 사람들을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가지고도 자기 생각하고 자기하고 비교하고 선생님이 어떻고 제멋대로 살아왔어요.
그 앞에 상대적인 요인을 갖추어 가지고 물을 수 있고 대할 수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차 버려요. 그거 넘어설 수 있는 이상까지도 가야할 상대적인 기준에서 갖춰야할 사랑의 도수가 그 때에 선생님 완성할 때에 사랑의 도수가 같을 수 있느냐?
돌아서 보면 전부가 불합격이에요. 자기 존재를 세워 가지고 아버지 무슨 상대적, 같이 사는 생활의 우리 아버지 내가 현재 사모하는 선생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상대적 자리에 내려올 수 없는 아버지라는 거예요. 그런 생각도 안 해봤는데 안 해본 사람들이 대회 같은 것도 자기들 중심삼고 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그 대회가 최후의 주인으로 와 가지고 밑에 그 분의 그 자리 와서 내가 좋아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없어요.
93년 동안 살아온 생애 모든 전부가 거룩한 핵에 일체 되어 있는 그 집으로 생각이나 해봤냐 그거예요. 그러면 회기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동고동락(同苦同樂)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8대 선조들과 동을 합해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세계까지 말하는데 그 6대도 몇 천분지의 일대도 모르는 자손이 8대 기준의 동고동락할 수 있는 아버지를 보고 그렇게 그것이 전체의 이상 된 뜻 앞에 상대적 자리를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없다 그거예요. 그런 차이를 가지고 천만 배, 몇 만 배. 음성을 서도 가당치 못한 그런 역사적인 존재들이 없다고 생활하고 모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 가치 그 이상세계의 영원한 세계에 또 다시 따라 가서 또 모실 수 있다는 욕망은 가질 수도 없는 거예요. 존재의 의식도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예수님 시대에 그때 소원도 못하고 말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참부모라고 어떻게 모셔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통해서 해방 받기 위해서 해방 됐는데 안 됐는지 몰라요.
언제 종착지점이 될 거야? 돌아서 가지고 이것이 이리 왔던 여기서 이렇게 선생님이 이런 이건 높고 나는 이렇게 낮은데 대등한 생각을 갖는다는 그런 상대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느냐 그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사랑 백 배, 천 배 하나님까지도 해방하고 남을 수 있는 시대를 거쳐 왔다. 그것도 다 잃어버리고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영계 가서 선생님이 타락의 핏줄과 관계없는 본연에서부터 태어난 아들딸이 궁에 가서 살아야할 존재가 어떤 가치냐. 선생님이 천대 만대의 아들딸도 타락의 후예의 그늘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해방, 밤낮의 하나님 해방, 예수의 이상적 국가의 해방, 재림주 이상적 국가의 해방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루어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자리가 너희들이 믿고 따르고 사랑한다는 말로서의 대등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있을 수 있느냐 그거예요? 없어요. 없는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거예요.
모시고 회개하고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말이 지성의 경계점이 어디냐 그거예요? 영계 가서도 천년 만년 발전해 갈 때에 이 타락한 세계의 사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있겠느냐? 생각난 자리에는 완전한 해방의 완성자리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바라보면서 이 대회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해방된 하나님도 부모님 앞에 와 가지고 그 대회를 끝났다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준비하고 있는데 너희들 준비 여기 돼 있어요? 자서전을 부정해요. 긍정이 아니에요. 자서전 실체, 천지인참부모 실체. 참부모 정착과 실체 중심삼은 말씀과 말씀 뭐예요? 실체 말씀 선포인 동시에 보다도 천주대회 완성이에요. 뭐 다릅니다. 천지인 참부모 정착과 실체말씀 선포, 선포하고 그 다음에 천주.「대회입니다.」대회는 타락의 여운도 없고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세계가 거기 들어갈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 자리에서 볼 때 너희들이 자기를 어떻게 하겠나? 이 땅위에 모든 병의 근원을 먹고 싣고 다닐 그런 파리가 나라님의 정월초하루에 생일잔치하는 데 있어서 전부 다 먹기 위해서는 발을 비비고 용서를 비는 자리가 있다 할 때에는 우리 자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그게 문제예요.
훈독회 내 마음대로 참석 안해도 돼요. 선생님은 훈독회 나는 고달파 선생님은 아침도 안 먹었는데 자기들은 점심에 가서 세상에 없는 음식을 찾아가고 세상에 안 좋은 자리를 찾아다닌다는 그런 존재들이 누구 것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 것이, 참부모의 완성의 자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자리에 있는 꽃, 이 자리의 가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전체의 그 위에 올라가서 산다고 망상하고 있다는 사실. 영원불변 세계의 동참 동착은 동일의 기준에 하나의 자리가 없던 자리. 선생님 이 갖고 있어요.
내적인 하나님도 하나님 자체가 지성이면 감천을 한다는 말을 생각할 수 있어요. 영어의 신세가 돼 있어요. 그 분을 해방시켜 가지고 그 분이 해방자리에 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의 세계가 있다고 할 때 그 이상에 있는 분을 모시고 같이 살고 영생 동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있을 수 있느냐? 없어요.
눈이 있더라도 볼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요. 대할 수 있는 상대가 못되는 겁니다. 그 이상 별의별 선생님 이러고 저러고. 동양에는 맞고 서양에는 맞고 우리 생활에 안 맞고 가야할 길에 앞에 나는 별의별 놀음하면서 같이 사는 동력자라고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어리석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영계 가서 다 복귀역사라는 것을 나 모른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고생했기 때문에 여기 왔다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자리에요. 여기 경제문제하게 되면 누가 써야 돼요? 선생님이 쓰다 남은 거 쓰지 않습니다. 쓸 수 있는 천만분지의 일도 안 되는 가정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 욕심내고 내가 싸우는 그런 부자들, 거기서 자기 아들딸 중심삼고 생각할 수 있는 부자지관계 인친관계 타락한 지상세계 하나님 마음속에 구름 아래 것이지, 이상적 사랑의 구름 위에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제 이 대회 끝난 다음에 ‘다 이루었다’ 할 수 있어요? 어제 밤에 양창식을 내가 불러가지고 얘기했어요. 선생님의 지내는 역사시대에 한 초 그 자체가 이 우주와 더불어 거룩한 자리였다. 한 사람이 이 전체가 거룩하다 할 수 있고 그 자리가 저 나라에 가서 그런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있다고 보느냐? 선생님 참부모도 타락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참부모 자리에 못 선다는 거예요.
참부모의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눈감으면 아버지 어머니 눈물 흘려요. 수많은 길 가운데 눈물 흘릴 때 지금도 눈물 흘려요. 지금도 타락한 아픔의 심정을 가지고 한탄을 해요. 참부모가 그럴 수 있는 생활이 끝나가지고 그 이상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참부모님 모실 수 있는 생각을 꿈에라도 한 번도 해보지,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 세계가 남아 있다는 거예요.
이건 내 것이에요. 내 아내, 아들들이에요. 자기가 아까워할 수 있어요? 자기 나라 세계 나라가 내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상의 것으로서 연결된 뿌리를 남겨놓고 자기 중심삼고 내 소유권, 내 물건이고 우리 지옥이 어디에요? 하나예요, 하나.
선생님은 천년 후에도 눈물지어야 되는 일이 이렇게 살던 것이 생각나겠나요, 안 나겠나요? 양창식이!「알겠습니다.」그 양창식이가 천년 후에 부모님이 기쁨의 자리 갈 때는 같이 가 있겠느냐? 그러면 선생님은 그 자리에 내려와 가지고 동료의 자리, 친구의 자리, 사랑한다는 자리의 조건적 사랑을 남기기 위해서 살았지. 모든 전체의 완결짓기 위한 주관적 사랑의 기준 자리에서는 아직까지 영원한 역사가 남아지는 것을 해야 돼요. 뭐 이러고 저러고 좋으니 나쁘니 이런 거 다 산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대회를 어저께 선생님은 그렇게 바쁜 아침에 90퍼센트까지 투입하면서 날라가다 10분만 더 하더라도 어저께 잃은 돈 봉창은 남을 것인데 열두 시가 넘어서 새날이 되기 때문에 보따리 싸가지고 왔어요. 부족해요. 어림도 없어요.
결론은 밤의 하나님, 낮의 하나님, 예수의 조상은 참부모의 조상 자리에 억천만세 거느릴 수 있는,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은 영원히 타락의 그 나라의 영원히 따라다니는 자리구만. 내가 내려가서 맞춰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 어머니를 바라볼 때에 이거 바라보니 안 보여요. 보여지는 어머니가 없어졌어요. 잡으려니까 없어요.
내가 잡으려고 하니 어머니는 높이 내려가야 돼요. 그건 내가 내려와서 붙들어 오는 거예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따라올 뿐이지. 앞에서 “이러소, 저러소. 이래주소!” 할 수 있는 입장이 영원히 없는데 그러고 살고 있다는 것이 평화나 행복이나 평화를 찾아가는 것이. 평화를 찾아갈 수 있는 시작은 되지만 행복의 사는 중심 자리는 못 된다는 거예요.
그거 어떻게 영계에 가서 그럴 수 있는 것을 내가 지상세계 잊어버리게끔 노력하느냐. 준비하느냐 하는 것을 준비가 남아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우주가 정착하지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공중에 떠 있어요. 사는 것 같지만 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표제가 천지인부모예요. 천지인 참부모 정착입니다. 누가? 사람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사람, 몇 천년, 수 억천만, 용어도 수리 수로서 갈 수 없는 숫자지. 같다구.
다 같은 꽃과 같은 잎과 같아요. 여기 유리 꽃이 이 잎은 영원히 유리 꽃입니다. 유리도 보게 되면 장미와 합해서 영원히 하나 될 수 있는 하나에 둘이 될 수 없어요. 그럴 수 있는 몸 마음이 싸우는데 그렇게 하나 될 수 있는 주체를 키우기 위한 자리를 내가 이루어가지고 나가야할 텐데. 자리도 없는데 주체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정착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정착한 자리에 어머님이 같은 자리에 정착할 수 있느냐? 내가 내려와서 맞춰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타락이 뭐예요? 대등한 가치의 자리에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그걸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렸던 그 가치의 자리를 이용해서 생각이 안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왔느냐, 안 올라왔느냐. 그 우주는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또 박차고 초월적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주인이 누구냐? 참부모밖에 없어요. 대등한 사람은 여기서 탈락되는 거예요.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이를 하늘과 땅이 일체되어 도니 여기에 와서 이곳의 한 자리에서 올라왔다 내려갔다 어디 가든지 대등한 가치의 참된 행복의 기둥이다.
선생님 자서전이 그게 숙제예요. 내가 내려와서 찾아올라 가가지고 나를 모셔 가서 살 수 있는 자리는 영원히 없구만. 그 답을 해야 돼요. 선생님이 이제부터 찾아온다는 선생님 체험이 없었던 사랑의 자리, 삶의 자리가 남아있구만.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저 나라 가더라도 눈물지을 수 있는 기도해야 되나? 기도는 없는데 내가 참부모인데 맨 꼭대기 왔는데 기도가 있을 수 없어요. 천년 만년 중에서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남아질 수 있느냐? 지옥에서는 피난하고 그것 부모님이 가졌던 것을 내가 가지려면 동참에 대등한 같지 않으면 못 가져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게 숙제입니다. 그렇다고 한숨을 쉬어야 되고 나 싫어요. 그리고 또 침묵을 지켜야 돼요. 보고도 모른척하고 냄새 모른척하고 참도 또 키워나가요. 선생님의 설교집 가운데 그거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지금.
대회를 어저께 내가 한다고 해서 아침서부터 시작했어요. 끝 안나요. 너희들에게 맡긴 것이 잊어버릴 수 있는 대회 잊어버리고 나서 이제 진짜 됐다. 그 때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상리 2222번지 그것만 소원이다. 그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잊어버려야 돼요.
잊어버리는 욕심의 왕이 돼야 돼요. 타락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깨칠 수 있기 위해서는 잊어버릴 수 있는 아픔과 원통함은 내 자신이 소화해야 돼요. 참부모가 될 때까지 강 어디 고생하기 그 생각이 안 나지 않아요. 땅의 그거 전부 자서전 선생님의 훈독교서가 다 살아있어요. 잊어버린 후에 잊어버린 그 처지가 더 높을 수 있는 소망의 핵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완성, 작품을 완성한 자리에 그런 생각이 끝나겠느냐? 그 끝난 자리에서부터야 하나님의 참사랑의 기아발이 영원히 돌아가서 만나는 거예요. 마디가 없어요. 아픈 데가 없다는 거예요.
온전한 사람은 아픈 데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만이 맞지. 그럴 수 있겠느냐.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참부모의 자리에서 완전할 때에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다른 곳으로 간다.’ 참던 욕망 하던 그 세계가 이 세계가 다른 세계로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에서 인연이라는 것, 정을 중심삼고 인연 됐던 그 인연들이 별동의 인연으로서 딴 때에 가는 선생님의 길 앞에 상대적인 요건이 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그거예요.
하나님이 불쌍하고 참부모님이 불쌍해요. 불쌍한 하나님이 참부모 만나 가지고 행복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것이 참 좋은 것이다. 그 사이에 한 1초 들어간 것이 이 땅 위에서 천년 들어가 노력하던 것보다도 더 빛나고 가치 있는 것이었구나. 이상적 해방의 천국이 이런곳이구만. 그래야 다 이루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다 잊어버려요. 잊어버릴 수 있어요. 내 눈이 그거 얼굴로 보게 되면 사진첩에 얼굴이 있는데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엎드려 기도하던 내가 찾는 사랑의 실체가, 사랑의 대상이 그 대상은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기쁨으로서 초월적인 세계로 향하여 도약해서 전진만 있을 수 있는 세계는 그럴 수 있는 어머니가 아들딸이 어디 있느냐?
죽으면서도 살았다 할 수 있는 숨을 안 쉬어봐. 아! 죽음의 자리,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 거기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믿기지 않을 자리가 없잖아 있긴 있는 거다. 몇 억 천만 죽음길이 있더라도 하나님과 참부모님 같이 넘어가야 되는 것이다. 넘어서면 아무리 지옥가고 아무리 천상에 가더라도 세상의 사실을 잊어버리고 거기서 청소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가려니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하는 말이 있어요.
그 길은 회개와 자기를 없애는 기준밖에 없다. 변화 해 가지고 자면서 나는 깨서 비행기 타고 날고 있다 할 수 있는 기쁨을 어떻게 느끼느냐? 잠에서 구름 위에서 어떻게 좋아하던 자리를 어떻게 남길 거야? 그 세계 올라가면서 연결되는 거예요. 연결된 한계에 자기 부정한 여기서부터 개인으로부터 대우주의 부정하고 이렇게 부활할 수 있는 세계에 삶의 기준을 찾아야 돼요. *(녹음 끊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