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도 이 땅 위에 오셔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모셔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심정의 기쁨을 느끼며 화하여 들어가는 자리에서 주인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갖추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리에서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 땅 위에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도 심정의 터전을 갖추어 놓고 하늘을 모시는 생활을 해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신랑이요 우리를 대해서는 신부라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라 하였습니다. 심정의 인연의 터전은 무엇인가. 부자의 인연이요 부부의 인연입니다. 또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맺어지는 형제의 인연, 동포의 인연입니다. 이렇게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떠한 존재를 내세워야 될 것인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어떠한 사람을 세워야 될 것인가.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 횡적으로는 세계를 통하고 종적으로는 하나님을 통할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실을 통하고 종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통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이루어 놓고 그 가운데 참다운 아들 딸, 참다운 신랑 신부를 세워야 됩니다. 그런고로 하늘은 심정이 연결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의 아들 딸, 하나의 가정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끝날이 기쁜 날인 동시에 슬픈 날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심정이 통하는 사람은 기쁨의 선물을 받는 날이요, 심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의 선물을 받아야 할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시는데 신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잔치는 신랑 신부가 상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한날을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섭리의 뜻을 따르는 신도들 또한 이 한날을 바라보고 싸워나오고 있습니다. 섭리의 목적, 섭리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단 하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랑 신부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그 한때, 하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만물 사이에 끊어졌던 인연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중심삼고 다시 맺어지는 그 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함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모시기를 바라느뇨. 오시는 주를 모시고, 나아가 그 주가 모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의 소망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이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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